들어가는 글..
오늘도 책 한권과, 말하고 싶은 주제를 들고 왔다.
사실 이 작업에는 마음이 크게 쓰이는데,
내가 과연 이 책을 제대로 읽은 것이 맞을까 하는 우려와
지금 쓰는 이 글이 나의 의도에 맞게 읽히고 있는가
이 두가지 이다.
독자의 입장과 글쓴이의 입장을 동시에 생각해보고 있다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조금 안심이 되는 점은,
작가의 손을 떠난 글은 더이상 작가의 몫이 아닌, 나름의 생명을 가진 개념집합이라 보았을 때
나는 나의 몫으로서 최선을 다할 뿐, 그곳에서 어떠한 영감을 받을지는 각자의 몫이라 본다.
작은 위안을 얻으며, 오늘도 필자가 이해하고, 바라보고 있는 세계에 대한 작은 조각을 남겨보자.
사실은 매우 추상적이고 익숙한 주제.
책을 읽는 사람들이 아니어도, 이와같은 이야기를 한번쯤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나'를 찾아야한다.
내가 나지 그럼 누구란 말인가.
바로 앞에 있는데, 뭐 또 내가 찾아야할 것이 있는가?
이런 생각이 들 수 있고
또 진부한 이야기를 하는구나.
먹고 살만하니깐 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
이렇게 느껴질 수 있다.
이제 슬슬 지겹기도 하고, 짜증나기도 한다.
도대체 '나'라는 것은 무엇이기에,
우리가 찾아야한다고 이야기하고 많은 방법들을 논의하고 있을까?
우리는 살아가며..
많은 선택지들을 만난다.
가장 간단하게는 당장의 저녁메뉴를 고민하기도 하며,
어려운 선택지들로는 결혼이나, 직업선택 등과 같은 일이 있을 수 있겠다.
결정엔 보통 몇가지 각자만의 기준이 따른다.
만약 필자라면, 저녁 메뉴는 이렇게 고르겠지
적당한 가격인가, 최근에 자주 먹었던 메뉴인가 등등
물론 저녁메뉴를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무엇이 그 선택의 기준이 되었는가.
이쪽이 더 가깝다.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나를 찾고 알아간다는 것은 나의 선택들을 이해하고, 앞으로의 선택을 보다 좋은 방향으로 결정 하는 것이 아닐까.
오늘의 책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의 이야기를 보며, 더 많은 이야기를 해보자.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제목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고,
두 인물,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이야기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수도원에서 시작한다.
어딘가 냉철해보이고, 사람을 꿰뚫는 듯한 눈을 가진 나르치스.
그는 그곳에서 수행을 하는 중이었다.
여보게, 자네는 너무나 고립되어 있고 외로운 존재야. 자네한테는 숭배자는 있을지언정 친구는 없거든.
- 수도원장이 나르치스에게
그렇다. 나르치스는 무척이나 뛰어난 인재였고, 누가 보아도 천재성이 드러나는 인물이었다.
수도원장은 그를 걱정하며, 때로는 철없이 굴기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듯 이야기하지만, 나르치스는 그럴 인물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그의 존재성에 대해 명확하게 알고 있었고, 다른 사람의 성격과 운명을 꿰뚫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물론 수도원장은 그런 그에게 몽상가이며 환영을 보고있다고 말하는건 재미있는 부분이다.
사람은 때론, 자신이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드릴 수 없는 것에 대해 일종의 정신적 문제의 결과로 치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수도원에 한명의 손님이 찾아오게 되는데,
그가 바로 골드문트 이다.
이런 나무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정말 특이하게 생긴 아름다운 나무에요! 나무 이름이 뭔지 알고 싶어요.
첫눈에 소년에게 호감을 느낀 문지기가 나무 이름을 일러 주었다. 소년은 문지기에게 정답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는 악수를 청하며 이렇게 말했다. " 저는 골드문트라고 해요. 여기서 학교를 다닐 거에요"
이성적이고, 분석가적인 기질을 타고난 나르치스,
그와는 정반대로 감성적이며, 예술가인 골드문트.
그들의 첫 만남이었다.
이성 ? 감성 ?
잠시 책을 덮고 이야기를 해보자.
이성과 감성.
아마 싸우면서 자주 하게되는 말, 듣게되는 말 중 하나가 아닐까?
이성적으로 생각해봐!
XX는 감성이 너무 메마른 사람같아. 목석같아.
그럼 이런 생각을 해본적은 없는가?
그들중 우월성을 따질 수 있을까
나르치스를 닮고 싶은 골드문트
우리가 이성과 감성에는 우월한 것이 없다고 이야기 하나,
사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순서를 정해놓을 수 있다.
그래, 사람은 자고로 이성적인 것이 기본이고, 그 위에 곁가지로 감성적인 것을 챙기는 것이지~ 하고말이다.
마치 그런 것처럼,
수도원에 들어온 골드문트는 나르치스를 닮고싶어한다.
그런 골드문트에게, 나르치스는 말한다.
네가 골드문트라는 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 줄 때면 나는 너를 진지하게 대해. 그런데 네가 늘 골드문트다운 것은 아냐.
제발 네가 순수하게 골드문트였으면 좋겠어. 너는 학자도 아니고 수도사도 아니란 말이야.
너보다 못한 재목도 얼마든지 학자나 수도사는 될 수 있어.
너는 나에 비해 학문이나 논리나 신앙이 형편없이 뒤진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천만의 말씀이야.
문제는 너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나한테 제대로 보여 주지 못한다는 점이야.
그래. 골드문트는 나르치스를 따라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이런 이야기를 할때면, 사실 조르바도 생각난다.
까마귀는 원래 까마귀답게 점잖고 당당하게 걸을 줄 알았지만, 비둘기처럼 거들먹거려 보겠다는 생각 이후로
원래 자신의 걸음걸이 마저 잊어버렸다는 것 말이다.
꼭 이성과 감성의 영역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삶이 언제나 비교의 연속선상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왜 자신을 찾아야하는 것인가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인 이유를 발견한 기분이다.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평생 수도원에서 살았을 것만 같았던 골드문트는
나르치스의 이야기를 들으며, 결국 그(나르치스) 가 가진 일종의 부름과 같은 것이 자신과는 다름을 인정한다.
그(나르치스)는 이미 자신을 바치기로 결심했으며, 움직일 수 없는 어떤 질서와 의무에 매인 몸이었다.
교단과 교회 그리고 정신이 요구하는 일에 헌신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에야 분명해진 사실이지만, 골드문트 자신은 그 세계에 속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
그런데 나르치스는 이 모든 사태를 오래전부터 얼마나 훌륭하게 통찰하고 있었던가!
정말 그의 판단이 옳았다.
결국 골드문트는 그렇게 수도원을 떠난다.
물론 세세하게 이야기한다면, 골드문트가 만나게된 여인이나, 잊고있었던 어머니의 존재 라든가
할말이 많지만, 지금은 넘어가도록 하자.
그런데, 나를 찾는다는 것은 뭘까
감성적인 사람, 이성적인 사람 이런 것일까?
이야기가 복잡해지는데, 이걸 어떻게 풀어야하나 걱정이 앞선다. 하지만 차근차근 써보도록 하자.
사실 골드문트가 수도원을 떠난 것은 나를 찾는다. 이런 거창한 이유는 아니었다.
물론 긴 여정 끝에선 찾았다 말할 수 있었겠지만
떠날 당시엔 두가지 이유가 있었다 볼 수 있다.
첫번째로는 수도원에서의 삶이 자신의 삶과는 맞지 않은 부분이 있는 것을 발견한 것.
두번째로는 잊고있었던 어머니라는 존재를 나르치스에 의해 깨우치고, 그 존재의 부름에 응답하러 가는 것.
넓게보면 하나의 울타리 안에 있는 내용이지만, 일단은 그렇다.
그 여정의 끝도 가히 충격적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런데 나르치스, 자네는 나중에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작정인가? 자네한테는 어머니도 없잖아?
어머니가 없이는 사랑할 수 없는 법일세. 어머니가 안 계시면 죽을 수도 없어.
친구에게 너 엄마 없지? 라고 해버린다.
어이 골드문트... 도대체 무슨 생활을 하고 온거냐고 !!!!
도대체 골드문트의 긴 여정의 해답에서 왜 엄마없지라는 패드립이 나오며,
이 여정이 결국 자신을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을까?
이야기는 더욱 깊게 들어가고 ..
꽃꽂이를 하는 남자. 복싱을 하는 여자.
메이크업 아티스트인 남자. 기계공학과 여자.
곽두팔 : 웅웅 나 그렇거같앙.
어떤 생각이 드는가?
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드는가. 무언가 어색해보이는가.
이 질문의 완벽한 의도를 알았다면, 이 글을 더이상 읽을 필요도 없다.
도대체 골드문트가 어머니를 찾는 것과 위 질문이 무슨 연관인지를 알려면,
칼 융의 심리학으로 .....
미안하다 선을 넘을 뻔했다.
하지만 만에 하나 호기심이 생긴다면, 칼융의 아니마, 아니무스에 대해 알아보면 좋다.
여기선 아주 쉽게 설명하자면,
이성중심 주의가 만연했던 사회에서의 사람들은 부여받은 역할이 중요하고, 정해져있으며
내면에 내재된 '다른 성향의 것들'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억압당했는데,
결국 나를 제대로 아는 것은 내 내면에 존재하는 내가 외면하고 있었던 것들에 대한 수용.
닥쳐 더 모르겠으니깐
골드문트와 함께 차근차근 여행을 떠나보자.
여성에 대한 집착, 예술세계 .. 그리고 나르치스
골드문트의 여정은 책 전반적이 내용이지만 여기선 짧게 소개하도록 하자.
( 거의 3/4 에 해당한다. 그말은 즉 .... 더 많은 내용은 책을 직접 읽어보며 느끼도록하자 )
어떠한 부름에 응답하기 위해 여정을 떠한 골드문트는, 어느 한 장소에 머무는 것 자체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방식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삶이 주는 안정감과 인정은 좋겠지만 그들에게 부여되는 책임 또한 막중하다는 것을 알기에, 방랑의 삶을 이어나가는 것이다.
죽음의 기로 앞에 서기도 하며, 스스로 사람의 목숨을 거두기도 한 골드문트는, 어느 마을에 있는 예술 작품을 보게된다.
그는 그 기술을 배우고자 마음먹는데,
그런 골드문트의 첫 작품은 나르치스에게 영감을 받고 만든 작품이었다.
이 형상은 제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그 친구가 저의 영혼에 이러한 형상을 심어 준 것입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예술 작품에는 작가의 혼과 같은 것이 들어간다고 믿는다.
사람의 영혼 이런것이 아니라, 그 작가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작가만의 철학 말이다.
골드문트가 예술의 작품으로 나르치스를 만들게 된 것은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아마 필자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나르치스라는 외부세계에 대한 존경이 아니었나 싶다.
( 사실 글의 끝에선, 나르치스의 원형도 알게된듯한 모습을 보인다. )
그러니까 나는 언제까지고 멍청하고 어린애밖에 안 된단 말이지?
- 골드문트가 나르치스에게, 수도원에서
우리도 늘 그렇다.
나에게 주어진 세상은 이토록 어렵게만 느껴지는데, 마치 처음부터 걷는 법을 알았던 사람마냥 잘 노니는 부류의 사람이 있다. 아마 수도원에서의 나르치스처럼 말이다.
골드문트는 애초에 그런 삶이 어울리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수도원에서는 모두가 그렇게 살아야하고, 거대하고 통일된 하나의 의지 아래에서 모두가 옳다고 믿는 길을 따른다.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골드문트는 그곳에서 영원히 어린아이일 수 있다는 의미이다.
너의 어머니에게 물어봐! 떠오르는 어머니의 상에게 물어보고 귀를 기울이란 말이야!
또.. 부모님 안부를 ...
나르치스는 진정으로, 친구 골드문트가 아버지에 의해 잊어야만 했던 어머니라는 존재를 다시금 기억해내길 바라는 것이다. 그의 길은 그곳에 있었으니깐.
즉, 골드문트와 나르치스는 태생부터가 다른 길을 걸어야만 함에도 불구하고,
수도원에서의 제한된 삶과 오래전부터 이어져온 아버지의 교육은, 골드문트에게 어쩌면 수도원이라는 세계가 마치 이 세계의 정답인 듯한 모습이었지 않았을까?
삶에서 아버지의 요소인 정신과 의지는 그의 고향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르치스의 고향이었다. 이제 비로소 골드문트는 친구가 했던 말들을 온전히 ... 생략
우리도... 그렇게 살아왔잖아?
뭐 그런 예술 작품 하나 갖고 그러냐 할 수 있지만..
골드문트는 이 예술들을 통해 그러한 결말에 다다르게 되었고,
우리 생활로 생각해보아도, 위대한 정신과 눈으로 보이는 실체가 밀접히 맞닿아 있는 공간이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예술적인 취미를 왜 하나쯤은 하면 좋은지는 무척이나 많기도 하다. 아마 비슷한 이유 아닐까
아무튼, 골드문트는 그런 작품을 하나 만들고는, 또다시 방황을 하게 된다
또 다시 여러 여자와 사랑을 하게 되고, 거처를 옮긴다.
큰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갖히기도 하며,
그를 구해준 나르치스에 의해 그의 첫번째 여정은 끝을 맺는다.
첫번째 여정 뒤에 ..
좋은 예술 작품의 원형은 실제로 살아 있는 형체는 아니지. 물론 예술 작품의 단서가 될 수는 있겠지만 말이야.
예술 작품의 원형은 피와 살이 아니라 정신적인 어떤 것이지.
나르치스와 수많은 질의 응답 끝에 골드문트는 문득 자신의 지나온 인생이 마치 세 단계로 보이는 듯 했다.
나르치스에게 의존하고 또 그에게서 벗어났던 시절
자유를 누리고 방황하던 시절
그리고 다시 자신의 내면으로 돌아와 성숙과 수확이 시작되는 시절.
그렇게 골드문트가 만든 마지막 작품은 마리아 상 이었다.
그렇지만 들어보게, 나르치스. 이 작품을 제대로 만들기 위해서는 나의 모든 청춘을 바쳐야만 했네.
청춘의 방황과 사랑, 뭇 여성에 대한 구애가 필요했지.
그렇다. 그 상은, 어머니의 부름에 응답해보려 한 골드문트의 작품이었다.
수많은 여성들은 단서가 되었고, 골드문트는 일단 만들어는 내었다.
그는 그렇게 마리아 상을 만들고 나서, 다시금 떠돌아 나서지만, 이내 곧 돌아온다.
부러진 늑골과 함께 말이다.
완전 폭삭 늙어버린 할아버지와 같은 모습이었지만, 그는 되려 그 모습을 마음에 들어하고.
자신의 두번째 여정이 어떠했는지를 전함과 동시에, 중요한 이야기를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머니의 상을 만들지도 못하고 죽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정말 참기 힘들었지.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아무 소용도 없다는 생각까지 했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 정말 놀랍게도 나는 어머니의 상과 늘 함께 있었던 걸세.
내 손으로 어머니의 상을 형상화하기는 커녕 어머니의 상이 나를 만들어 주신 걸세.
그리고 그는 나르치스에겐 어머니가 없다는 말을 하며
숨을 거둔다.
글을 정리해보자.
우리는 모두 한명의 골드문트들 이다.
수도원에서 거대한 의지 아래 같은 정신을 공유하는 것을 희망하고 따르는 상황에서
누군가는 그곳에서의 삶이 자신과 완벽히는 맞지는 않다고 느꼈을 수 있다.
물론 사회를 파괴하자는 의미가 아니다. 희생된 나의 일부를 찾자는 의미이지.
골드문트가 어머니의 부름을 기억해낸 것처럼,
우리 또한 정해진 세계 아래에서 우리가 미쳐 선택할 수 없었던 수많은 것들이 존재한다.
그가 아버지의 세계에서 받은 교육이 그러했듯이, 우리 또한 크게 다르지 않으니깐.
나르치스는 지성을 대표하는 인물이며, 미성숙한 골드문트는
자신과 나르치스를 동일선상에 두지 못한다.
오히려 나르치스는 골드문트가 더 위대하다 말한다. 정해진 길을 따르면 되는 그였기에 말이다.
삶의 체험 속에서 골드문트는, 자신은 나르치스의 정신세계에 형상을 부여하며
나르치스는 자신의 예술가적 영혼에 원형의 단서들을 심어주었음도 알게된다.
이야기를 읽는 우리들도,
감성과 이성. 무엇이 더 우월한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고
그것들이 서로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각자의 예술작품이야 말로, 가장 큰 의미가 있다 생각하지 않나?
아님말고..
그리고 골드문트는, 이야기의 끝에가서야
자신이 어머니의 부름에 따라 그 형상을 만들어내기위해 평생을 노력했지만,
사실은 자신 안에 이미 존재하여 자신을 만들어주고 있었음도 알게된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나 자신은, 외부세계에 조각처럼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이미 존재하지만, 수도원에서는 절대 표출되지 못할 수 있으며, 우리가 외면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나를 알아간다는 것은,
입체적인 나의 모습을 받아드리고, 주어진 사회속에서 내가 잃어버리고 있던,
나의 일부를 외부세계가 아닌 내가 망각한 세계에서 찾아내야 하는 것이며
그것이 골드문트에게는 속에 존재하는 어머니의 형상이었던 것이고.
우리에게는 나를 찾아 떠나는 방구석(?) 여행이 되는 것이다.
이제 다시 한번 읽어보자.
이성중심 주의가 만연했던 사회에서의 사람들은 부여받은 역할이 중요하고, 정해져있으며
내면에 내재된 '다른 성향의 것들'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억압당했는데,
결국 나를 제대로 아는 것은 내 내면에 존재하는, 내가 외면하고 있었던 것들에 대한 수용이다.
정리하며..
글을 약 2주간 썼다 지웠다 했다. 그만큼 신경이 쓰였고,
아마 다음 글은 더 오래 걸릴 수 있다. 기존 글을 완전 다시 적을 수 있고.
사실 담고싶은 내용도 많고, 적고싶은 내용도 많지만.
그것은 책을 읽는 사람과 읽을 사람에게 남겨두겠다.
책에서는 중요하지만, 적지 않은 내용도 많다. 그것은 다 옮겨담지 못한 필자의 부족함이라 이해해주면 고맙겠다.
새벽 두시 반 가까이 가서야 마침내 끝을 억지로 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나는 좋은 작가는 못되겠다는 생각을 한다.
사실 그간 괴로웠던 마음도 있다
최대한 쉽게 읽힐 수 있게, 풀어쓰고 이해를 돕기위해 여러 방향을 고려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아마추어임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핑계)
글을 적다보면 언제나 나의 소설이 쓰고 싶어진다.
나는 내 삶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을까. 이것 말이다.
깊은 밤이다. 좋은 글을 읽고 마치자.
자네가 보기엔 세상이 온통 죽음과 공포로 가득 차 있고, 그래서 쾌락을 도피처로 삼는단 말이로군.
하지만 그런 쾌락은 오래가지 못하는 법일세.
그런 쾌락은 다시 자네를 황폐한 곳으로 몰아낼 걸세
'사람 사는 이야기 > 책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삶 (0) | 2024.09.22 |
---|---|
작고 가벼운 우울 (3) | 2024.09.18 |
03. 죽음과 함께 춤을 ( 책 : 이반 일리치의 죽음 ) (2) | 2023.07.16 |
02. 인생에는 꼭 정해진 의미가 있어야 하는 것일까? ( 책 : 인간의 굴레에서 ) (0) | 2023.07.02 |
01. 나는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 책 : 싯다르타 ) (2) | 2023.06.19 |